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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유래담

길이 없었던 삼보골

  • 문 : 예전에는 시내까지 어떻게 가셨어요?
    • 답 : 예전에는 길이 없었어. 저 영원산성까지 이사가면, 지게로 지어다가 영원산성까지 가고. 또, 시내를 가도 시내까지 이삿짐을 다 지게로 지어다 줬어요 길이 없으니까. 그런데 요즘엔 이렇게 커졌지. 요즘은 길이 있으니까. 차가 다니지. 예전에는 형편없었지요. 이 근방 마을이 다 그랬어요. 사람 걸어 다니는 소롯길도 없었어요. 서리실에도 없었어요.
  • 문 : 그러면, 큰 길은 어디까지 가야 있었나요?
    • 답 : 저 시내 나가야지. 원주천 지나야지 있지. 신림 넘어가는 신작로. 충주 넘어가는 길 이렇게 밖에 없었어요. 여기서 길을 하러 어디까지 갔냐면, 부역이 라고 해서 충주 가는건 귀래면. 흥업. 거기까지. 일년에 몇 번씩 돌 자갈 하느라고 돌아다니고 했다고. 여기서 걸어가지고. 신작로 자갈 때문에 충주 가는 길은 서곡 지나서. 흥업 면소(면소재지) 못가서 거기까지 가서 일을 했고. 이쪽은 금대리 그 아래까지 가서 부역하고 그랬어요.
  • 문 : 부역은 언제까지 하셨어요?
    • 답: 거진 육십에서 칠십년대까지 했지.
  • 문 : 삼보골에서는 화전을 많이 하지 않았나요?
    • 답 : 여기는 별로 하지 않았는데. 삼보골에서는 재민네가 제일 많이 했어. 곡석을(곡식을) 한 삼십에서 사십 가마 정도 했으니.
  • 문 : 예전에 울력도 하셨나요?
    • 답 : 해 주었지요. 저녁 먹고 해 주는 건데. 혼자 힘이 들면 사람을 여럿 불러서 지고 온다고. 그러면 그 집에서 밤참도 해주고 그랬다고. 근데 얌체가 있으면 안 해줘. 예전에는 어려웠는데, 보리, 밀이 없어서 호밀까지 해서 먹고. 그것도 없어서 칡뿌리 벗겨 먹고, 하루 품값이 감자 한말이었으니까. 일류목수 기술자라야 쌀한말 받았다고. (최종희, 남, 75세)

1940년경의 배울마을

  • 문 : 할머니 고향은 어디세요?
    • 답 : 원래는 저기 저. 황둔 삼거리라는 데 있지. 거기 살고 있었는데. 인제시집을 두산리라는 데로 갔어요. 두산리라는데 가가지고. 거가서. 시집가자 마자 1년을 있다가. 딱 1년 살았어. 그리고 나서 이리로 나온 거야. 18살에 이리로 나온 거야. 17살에 인제 막 그전에는 옛날에는. 일본 정치 때 일본 정치 때. 여자들. 처녀들 막 뽑아가고 그랬잖아. 뽑아가고 그랬는데. 시집을 가면 안 뽑아가고 안가면 뽑아간다고 그래드라고. 그래는데, 인제. 그때까지 난 공부도 마치지 못하고, 열일곱인데.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어따(어디다) 주고서는 곁에 다 시집을 주고. 두고 보는 게 게 났지. 그냥 일본 같은 데루 뽑혀 가면, 자기 만나지도 못 한다고. 아무데나 주고서 만 거야. 시집을 이제 산골로 갔다 가 1년 있다가서는. 내 그 때.17살에 해방이 되었어. 시집을 주고 나니까. 잔칫날을 받았는데, 해방이 되었다고. 난 그래 너무 억울하지. 그러다가 두 산리로 시집을 가가지고.
  • 문 : 두산 어디로 가셨어요?
    • 답 : 두산 뱅산. 아실러는지 모르겠네. 뱅산이라는 데로 갔어요. 그리로 시집을 갔다가. 산골이지요. 뭐. 지금 아무 것도 없어. 아무것도. 옛날에는 집이 그리로 올라가며 드문드문 삼으 있었어. 많이 있었어요. 집이. 시방은 인제. 산골에서 다 내쫓쳤잖아. 다 이리로 나오고 이랬는데. 우리는 그러니까. 시집을 갔다가 논 사가지고 바로 이리로 나왔어.
  • 문 : 처음 들어오셨을 때 배울에는 몇 가구가 있었나요?
    • 답 : 그러니까는 옛날집이 몇집 있었는데, 그렇게 많지는 않았고. 가구 수가 몇 집 아니지. 우리 집 하고, 여기이 집하고, 여기 해욱이네 집하고, 상룡이네 사는 집하고, 고 위에 집 하고, 봉련네 집이 있었고, 그리고 정호네 집이 있었고, 그러고는 없었어. 6가구 정도. 한 여섯 일곱가구. 한 여덟가구정도 되겠네. 고동네에도 있었으니. 그 위에 정호네하고 있었어.
  • 문 : 그 당시에 무슨 농사를 많이 지으셨습니까?
    • 답 : 다 농사짓고. 집집이 다 농사지었지. 주로 여기는 논농사를 많이 지었지. 그러고 여기 저 건너로 이사 간 집은 '부자집'이라고 그랬는데, 논도 엄청 많이 부쳤었고. 그 집이 잘 살았고. 이집이 잘 살았고, 두 집이 잘 살았고는 그저 다 그저. 비슷비슷하게 살고. 더 못 살구. 그냥. 남의 장례쌀 먹고 이러는 사람이. 만날 쌀이 없었으니, 한 가마 갖다 먹고, 가마 반 내주고 가을에. 이런 사람이 전반이었지.
  • 문 : 그러면 가구 수가 예전에 비해 많이 늘었네요?
    • 답 : 늘었지. 한 해 한 해 하나씩 늘었지. 한 해 한 해 새로 지은 집이 좀 늘었지. 여기 한 여덟가구나 이 정도는 있었어. 그리고는 다 새로 지은집이야.
  • 문 : 배울에 들어오셨을 때 마을에 쌀이나 돈을 내어 놓지 않았나요?
    • 답 : 그런 게 없잖아요. 없는 것이 왜냐하면, 아주 못 먹고 살아서, 아이구 못 먹고 살구 말구. 칡뿌리 캐다가 해먹고 살고 이랬어요. 누구도 와 줄 수도 없어.
  • 문 : 마을에 대동계는 있었나요?
    • 답: 대동계는 있지요. 대동계는 저위에 동네랑 합쳤지. 이동네랑.
  • 문 : 봉대마을이랑 합쳤나요?
    • 답 : 봉대쪽으로 뱅이둑 사람 이런대로 합쳐서 있었어요. 시방까지도 해요. 뱅이둑 자체는 없고. 집 몇 집 안 되니까. 다 그리로 대동계를 들었지요. 대동계를 들고, 우런(어른) 들이 해서 잘 모르지만, 쌀 같은 거 쪼금 내고, 돈은 없으니까. 이런 거 하고 대동계에 들은 거 같아요. 뭐냐 하면 시집가면 가마 갖다 쓰고. 차양 치는 것 있잖아요. 그거 차양하고 가마 갖다 쓰고. 대동계 그릇이 있잖아요. 여인들. 잔치하면국수 같은거 담아야 하니까. 그런거 같다 쓰고, 장사나면상여 쓰고.
  • 문 : 예전에 봉대마을은 비교적 컸네요?
    • 답 : 뭘 그 때는 인구가 많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여러 마을이 합쳐가지고 대동계를 한 거지. 그렇게 합쳐서. 시방도 여태 안 없어지고 대동계가 있어요. 이번에 혁신도시 때문에 깨지는 거지. 행상 갖다 놓는 곳집도 거기 다 있었고, 가마도 거기다 있었고. 큰일 나면 그 위에서 가져다 갖다 쓰고. 벼 해드 리면, 왜. 옛날에는 발기계를 놓고 떨잖아요. 모를. 발을 밟으며. 그 논에서도. 그 먼데서도 다 여 집에다가 볏단을 지어다가 가린다고. 둥그렇게. 벼를 져다가 이쁘게 저 둥그렇게 가리를 놔. 날을 받아서 이 집이 떨고, 저 집이 떨고. 날을 받는다고. 그리고 내일은 저 집이 떨고, 모레는 저 집이 날을 싹 받아놔. 날을 받아 놓고는 새벽서부터 막 발 기계 두대를 놓고 막 떨지.새벽서부터 막 발 기계 두대를 놓고 막 떨지. 일꾼들이. 발기계 두 대를 해 놓고 막 떨구. 새벽 조반 해먹고 떨구. 이래서 옛날엔 가마니가 있잖아. 거기다 막 퍼 담아 가지고서는 각각이 싸 놓지. 그거 많이 싸놓는 집은 말하자면 '노젓가리'지.
  • 문 : 노젓가리가 무슨 말이에요?
    • 답 : 벼를 많이 싸 놓는 게 노젓가리지. 그렇게 싸 놓고 인제 모두 농사를 많이 짓고, 부자집들은 그렇게 해 놓고. 그렇게 한 다음에는 이 지붕을 해 이어야 되잖아. 지붕을 서로 이엉을 그네루 돌아가면 이엉을 엮어서 해이었잖아. 초가집이니까. 가을에는 싹 다이었잖아. 그러면 팥죽을 해가지고 떡하고 팥죽하고 쑤어 가지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먹고. 그 다음에는 가을떡을 해 먹어. 농사 다 지었다고. 가을떡을 해가지고. 시루 몇시루를 쪄서먹고. 동네 사람들 다모여서 먹고. 안오는 집은 갖다 주고. 인심이 참 좋았어요. 먹을 건 없었어도. 배울이라고 그래는데. 왜 배울이라고 그러는지는 모르겠네.
  • 문 : 양지배울이 더 많이 사셨나요?
    • 답 : 양지배울이 조금 더 많았지. 여기는 뭐 요만한 데만 있고, 저리는 저렇게 내리가며서 집들이 있었으니. 예전에는 저쪽하고 이쪽하고 같이 놀고 그랬지. 모여 앉아 노는 거는 양지배울과 많이 같이 하고, 대동계하고 하는 것은 봉대랑 많이 하고, 저 기는 동이 다르니까. 요개울을 따라서 저쪽으로는 행구동이고, 이쪽은 반곡동이고.(최종희, 여, 78세)

나무장사 이야기

저기 치악산 보이잖아요. 저 위까지 나무가 없었어요. 예전에는 저기까지 올라가서 나무를 홀랑 뺏겼어. 옛날에는 시내도 다 나무를 뗐는데, 나무장사들이 얼마나 많어. 장작을 해다가 패가지고 한 지게씩 해서 짊어지고 가서 식전에 가서 팔잖아. 낭구[나무] 파는 데가 있었어. 갖다놓으면, 행상들 나와 보고 좋은 게 있으면 사고. 그러면 그 집까지 져다 주고. 낭구장사 엄청 많았어요. 광솔 장사도 있고. 그것도 많이들 하고 광솔 장사들도 있고. 그것도 광솔장사도 그걸 요만큼씩 묶어가지고 가면은. 그거 불소시게도 하고. 그래잖어. 그거 불붙이면 잘 타잖어. 장작 놓고 거기다 불 지피면 잘 타니까 그러니까, 온 옛날에는 낭구도 타고, 모두 잘 탔지. 나무장사 엄청 났어요. 낭구 장사, 숯장사, 비싸리 장사. 비싸리 비 이렇게 쓰는 거. 비도 매가지고 가고. 남자들 고생 많이 했지. 저 산꼭대기 가서 하루에 나무 한짐 밖에 못해가지 오잖아.(최종희, 남, 75세)

뱅이둑 디딜방아

  • 문 : 지금도 방아가 있나요?
    • 답 : 지금도 방아가 있어요. 방아가 있는 집은 우리 하나고. 동네. 동네 방아가 저위에 공동 방아가 또 하나 있었지. 그러니까 남의 집안으로 빻으러 오면은 그러니까 밖에다 방앗간을 하나 만들어서 거기서 했지요. 그게 아주 없어질 때는 여기 와서 했고. 그랬어요.
  • 문 : 방아를 언제까지 사용하셨어요?
    • 답 : 그러니까. 이 방아는 메주 있잖아요. 메주. 지금은 뭐 메주를 쒀서 자루에다 놓고 꽉꽉 이렇게 밟아서 메주를 하지만. 옛날에는 밟고, 절구에다 찧고 이렇게 했잖아요. 그런데 옛날에 많이 하는 거는 언제 절구에다 쪄. 그러니까 사람들이 집에서 메주 쑨 걸지고 와서 저 방아에서 찧었지. 그랜 거는 몇 년 안됐어요. 그리고 또 메주 바쉰다고 메주, 말른 메주 빻는 거. 막장. 된장 이런 거. 된장은 그냥 물에 담궜다가 하지만. 막장이라는 거는 메주를 빻아서 얼개미로 쳐가지고 하거든요. 그거 하는 거는 여기 와서 빻아서 갔어요. (함기선, 여, 7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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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4.06.19